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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는 우리 친정 어머니 아버지가 북에서 왔어, 우리는.

 

북에서 와 가지고는 영월이라는 곳에 이사를 오셨대.

 

그건 나는 몰라 이제 나를 가지고. 75년 전 전에 얘기야.

 

그래가지고 왔는데, 영월을 왔는데, 숟갈도 하나 못가지고 왔지.

 

팔월 그때, 왔으니까는, 광복절 때.

 

그래가지고 그냥 남의 일을 해시고 장사를 해가지고 살다 살다 좌운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셨대.

 

근데 나를 가지고 배가 이만해신대,

 

남에 집에 사니까 애를 한 집에서 둘을 못 낳게 하더래.

 

애기를 한 집에서 둘을 못 낳게 하더래, 남의 사랑방에 사니까.

 

그래서 그렇게 우리 엄마가 나 낳은 거를 많이 후회하셨대.

 

먹고 살기 힘들은데.

 

그런데 이제 우리 어머니하고 살았지.

 

아버지는 육이오 때 돌아가셨어, 나는. 그래서 얼굴도 몰라 아버지 얼굴을.

 

나는 근데 아버지라는 사람을 되게 좋아해.

 

그래서 니들같은 애들은 남자애들은 되게 좋아해 나는.

 

남동생이 없이 내가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빠 언니 둘, 둘에 오빠 하나에다가 내가 막내였어.

 

그런데 오빠도 원고를 나왔어.

 

원주고등학교.

 

그래가지고는 어머니가 그냥 장사를 해면서 가르쳤어.

 

그러다가 돈을 뜯기셨어 중간에, 우리 어머니가.

 

돈을 뜯겼다고, 우리 어머니가.

 

그 돈을 뜯기니까는 나는 학교 가고 싶은데, 그 꿈이 있었거든.

 

애들 교복 입은 것도 부러웠고.

 

그래서 좌운에 탁아소라는게 하나 생기는데, 이제 애들 이렇게 봐 주는거야, 일 가면.

 

그거 할 사람 있냐해서 내가 핼거라고 나는, 내가 봉사할 거라고 그랬어.

 

교회를 그때서부터 나는 열심히 나갔어, 교회를.

 

그 북에서 왔으니까 우리 친척이 없잖아.

 

우리 북에서 왔으니까 친척이 없어, 일단 친척이.

 

친척이 없어가지고 여기 민씨 네 집에 오는 것도 친척 많다는 거.

 

여기, 여기 친척이 많잖아 민씨들이.

 

너무 좋은거야, 그냥.

 

와 집안이 생겨서.

 

그렇드라고.

 

그 공부하는 기간이 되가지고 초등학교를 새로 맡았는데,

어떻게 내가 공부를 해나, 그 생각을 하니까는 앞이 막막해 아주.

 

공부하고 싶은 욕망은 난 엄청난데.

 

그래가지고 이종 사촌오빠가 또 북에서 오셨어, 우리 이모네 오빠가.

 

온 거를, 오빠 나 중학교만이라도 가르켜달라고, 그래서 내가 양구를 갔다 내가, 오빠네 집으로.

 

양구를 갔는데, 그 올게가 얼마나 고약한지, 밤 날 싸워 나 데려다 놓고, 공부시킨다고.

 

그때 열 네 살이지, 그럼.

 

그러면, 오빠! 나를 가게 보게 점원으로 넣어 달라고, 내가 돈 좀 벌어가지고 공부해면 되지 않겠냐고.

 

그래서 내가 거기 양구가서 가방가게에다 넣어 주더라고, 오빠가.

 

내가 집에 간다니까 집에 가 뭐해냐 너 시골가서 뭐할거야 그러면서 여기서 공부할게 나은데.

 

나 살아온게 엄청 힘들어 (웃음).

 

그래서 인제 거기서 이제 가방가게를 해면서는, 근데 아저씨가 구박이 말도 아니야 거기도.

 

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뭘 정리해라 뭐 볶아쳐.

 

이제 그래도 그게 내가 한게 큰 기틀이 있었어.

 

 기틀이 있었는데, 거기서 있다가 좌운이라는, 집으로 왔어.

 

집으로 오니까는 면세점이 생긴대, 좌운에.

 

그래서 아저씨들, 조합장님들한테 나 시켜주세요, 나 어머니하고 살게.

 

우리 어머니는 혼자잖아.

 

오빠는 서울로 갔었어, 우리 오빠도.

 

지금 우리 오빠 성북구 하월 거기 월곡시장에서 장사해, 우리 오빠는 지금.

 

우리 오빠도 서울로 가서 아주 삐기고 삐겨가지고 장사해지.

 

장사해가지고 오빠는 올라가고 어머니랑 단 둘이 사는데,

 

어머니가 농사를 하시는데,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은 들더라고, 내가.

 

근데 한계점이 있어 인생은.

 

부모가 뒷 바라지 해줘야 해. 부모님한테 잘 해야해.

 

 그 집에를 오니까는 면세점이 생긴다고 그러는데, 조합장님하고 가서 내가,

 

아후 나 점원 시켜주면 안될까요,

 

그러니까,

 

생각해봐서,

 

그러더니 아무 답도 없는거야.

 

거기서 아무 답이 없어.

 

그래서 안 시켜 줄려나 보다 하고 인제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는, 하루 또 가서 또 그랬지.

 

아우 나 돈 그거 안 받고 한번 해볼게요, 응? 핼 수 있어 나 해볼거에요.

 

문제집을 이만하게 내주더라?

 

계속 이거 더하기 빼기 해가지고. 문제집을 해줘가지고 가지고 올라 왔어.

 

그때는 컴퓨터 없었잖아.

 

주판 다섯 개짜리, 밑엔 네 개, 위엔 두 개.

 

그래 주판이 있었어.

 

밤새 똑같은 답이 나오게 해서 그걸 주판을 나와 봤어.

 

똑같은 답이 나와야 그게 맞는 답 아니냐?

 

두 번, 그 두 번 딱 떨어져야.

 

우리 어머니는 북에서 오셨는데, 공부시키는걸 못하셨어.

 

여자분이 강해요 북한여자들은.

 

어머니 농사를 하시고,

 

나는 이렇게,

 

오빠는 서울로 갔고,

 

언니들은 있다가 결혼했고,

 

야 시골서 내가 뭘 해가지고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난 그때서부터, 열 네살, 열 다섯살일 때 내가.

 

그리고 나는 그때 그걸 했구나,

 

탁아소를 했구나, 탁아소도 생긴다고 했어.

 

교회 나가서,

 

그런데 교회에서 키워준거야, 나는. 목사님이랑 전도사님이.

 

보모를 저기 그거를 해보라고, 주일학교를 해보라고.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는거야, 주일학교 해는게, 애들 가리키는게.

 

그래 난 배워서 뭘 해긴 해야돼 내가 (웃음) 응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가지고는 탁아소가 생겨서 탁아소 보모 해는거를 춘천 가서 데리고 갔더라?

 

그런데 초등학교 나와서 나는 학벌 딸리니 어떻게 뭘 핼 수가 있어야지.

 

가니까 전부 고등학교 대학교 나온 애들인데 그 자리 가니까.

 

뭐 음악을, 뭐 음악을 할 줄 아나.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봉사할거라고.

 

난 애들 데리고 놀고 나 그렇게 재밌게, 난 봉사를, 그거를 안 받는다고 하니까는,

 

이장님이,

 

그럼 그거를 해봐 그래면서, 보모 수당 나오는 거를 조금씩은 줄게 그래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인제 해다가, 또 안되겠어 그렇게 해가지고는.

 

교회 가서 참 설교를 들어봐도 그렇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거지 정말, 농촌에 시집가는 것도 싫더라?

 

근데 배운 남자를 얻으려면 내가 이제 알아야 되잖아?

 

그래서 교복입은 애들 보면 부러워 죽겠어. 그냥 애들보면 막 숨고 그랬어.

 

그때는 얼마나, 그리고 칠십년도 안됐잖니,

 

그때는 서로다가 밭을 갈고 물도 길어다 먹고.

 

난 물도 시골와서 어무니하고 있으면서 동이라고 이렇게 물 이고 당겼어.

 

근데 먹는거는 어머니가 원채 강하시니까는 걱정 안하고 살았지.

 

근데 면세 그 이야기 하다가 끝났지만, 답을 가져와다가 했어, 인제.

 

그때가 스물, 4H[1]. 4H알어? 4H 활동.

 

젊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해가지고 가을이면 연 해는 거.

 

알아?

 

몰르지.

 

그 4H라는거를 했어.

 

근데 자기 특산물들, 호박도 가져다가 팔고 웅변도 하고, 과일 같은 거를 특이하게 음식도 만들고.

 

가을이면은 나라에서 그렇게.

 

또 안되겠어서 4H활동을 했어.

 

그러니 여기 오니까는 조합장이랑 여기로 오니까는, 지금 여기 성수, 성수로 오니까는, 자랑을 해더라고.

 

당기면서 여기 집을 다 구경을 시켜주더라고 성수를.

 

그런데 세월은 자꾸 가잖아.

 

그러고 어머니하고 농사 지어 볼라고 해도 그것도 아니겠고,

 

저쪽에 조합이 생긴다고 해서, 그냥 막 때를 썼어

 

내가 막 그냥 내가, 핼 수 있다, 핼거라고 나 돈 안 받고 핼거라고 일 년이고 날 시켜만 줘보라고.

 

그러고했더니 그 조합장님이, 지금 누군가 하면 민미영 시아버지야.

 

그 양반이 그러더라고 그 저렇게 핼라고 하는 애를 한번 시켜보라고 배운 사람들보다 노력하는 애가 났지 않냐고.

 

그렇더라고.

 

그런데 내가 오라고 하는데, 막 밤이 잠이 안오도록 설레는거야 그거라도 그거라도 (웃음).

 

그렇게 해서 거기서 몇 년을 했나?

 

어머니하고 살면서.

 

어머니는 농사하시고 나는 이제 거기를 당기고.

 

그렇게 어머니하고 사는게 좋았어, 나는.

 

근데 남들이 아빠 있는 거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나는 시아버지 있는데 시집을 가야지, (안그러면) 안 간다고 그랬더니

 

조합에 가더니 시골 남자애들이, 되게 짓궂은 애들이 많잖아.

 

저녁 때 이제 퇴근을 하고 가잖아, 집에를? 가면은 막 길을 막고, 네가 뭘 잘났냐? 나보고.

 

그러면서는 야 내한테로 시집을 와라, 하고 막 그냥 조롱들을 해.

 

그래서 나는 그렇게는 안 간다, 내가 너네한테는, 난 그렇게 안가고 난 내 길을 찾아가지고, 난 그렇게 안 간다고.

 

근데 오면은 사람이 학벌을 물을 때, 어디 나왔냐고, 그래서 나는 내가 새끼를 낳으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리키리라.

 

학벌을 물을 때 제일 힘들었어, 나는.

 

거기 총각들도 많고 군청에서도 오고 도에서도 오고 많이 오잖아, 출장들을.

 

그랬는데, 사람들이 왔는데 그렇게 학교라도 나왔냐고 하면은,

 

그게 제일 힘든거야 내가 아주.

 

지금 생각해면은 방통대라도 했으면 어떠냐?

 

그것도 누가 밀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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