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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영귀미 詠歸美

2023. 06. 29 – 2023. 07. 06.

국민대학교 K-art 갤러리, 서울, 한국

전시 서문

■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올 당신의 노래가 들리고 

박수정 (독립기획자)

 

 박주희의 작품 세계는 ‘기억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구제되어 온 것이다.’[1]라는 존 버거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속초1리 경로당을 찾은 8명의 할머니[2]들로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를 꺼내어 기록하는 과정은 존재함의 상태를 회복해 나가는 ‘기억됨’의 행위로 확장되고, 이는 인터뷰 영상, 사운드가 결합된 설치 작품들을 통해 보여진다. 

 

 전시장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영귀미 詠歸美>는 경로당을 배경으로 8명의 할머니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흑백 영상을 통해 보여준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 학업에 대한 아쉬웠던 기억, 생애 속 크고 작은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얼굴은 정면과 측면을 오가며 화면에 나타난다. 작가가 작품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로부터 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은 마치 긴 실뭉치를 쥐고 있는 상대로부터 온기가 남아있는 실 한 가닥을 천천히 손에 옮겨 담아 감아내는 것과도 같아 보이는데, 특히 영상 마지막에서 ‘오동도 타령은 뭐에요?’ 같은 작가의 질문에 맞춰 짧은 노래 구절을 읊는 장면을 통해 멀리 있던 기억과 이야기를 끌어내는 특유의 작업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전시장 벽면 뒤로 걸음을 옮기면 펼쳐지는 <노동 그릇>은 시멘트로 된 40여 점의 그릇들로 구성된 사운드 결합 설치 작품이다. 항아리, 사발 등 다양한 그릇들은 전시장 바닥에 놓여 관람객들이 그 주변을 걸으며 이제는 오래전 일이 된 어느 날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요리를 만들고 식사를 챙기는 부엌 속 가사 노동은 매일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다시 반복될 식탁 위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오늘 일구어낸 노동의 흔적을 말끔히 없애야 한다. 깨끗하게 닦아낸 그릇들을 정리하고 손의 물기를 옷자락에 묻히고 나면, 온 가족을 즐겁게 했던 식사 시간은 마치 없던 일처럼 사라지고 안락한 배부름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현장에서 매일 새로운 흔적을 만들고 닦아내며 일상을 꾸려온 그들이 느꼈을 삶의 고단함, 한 인간의 오롯한 아픔은 한숨이 되어 그릇 위로 쏟아졌을 것이고, 고뇌를 담아 머뭇거리던 손가락 끝은 단단한 그릇의 테두리를 여러 번 두드렸을 것이다. <노동 그릇>의 그릇들은 형태의 일부가 골조를 드러낸 채로 놓여 있는데 이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의 무게를 받아 내왔던 흔적을 상징한다. 그릇 위로 흐르는 노랫소리는 드러난 골조의 틈 사이를 오가며 관람객에게 그릇에 담긴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온전한 하나의 곡으로 완결되지 않는 음성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며 그사이에 바람 소리와 어딘가 숨어들듯이 희미해지는 먹먹한 효과와 함께 전개된다. 마디를 나누어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이들이 놓였던 노동 현장의 특성과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마지막 공간에 설치되어 있는 <까꿍!>은  전시장 천장과 바닥에 파이프를 통해 연결된 낯선 시멘트 구조체로, <영귀미 詠歸美>와 <노동 그릇>을 통해 수집한 이야기의 소리를 증폭시키고 넓히는 연결 지대의 역할을 한다. 도시의 모양을 굳히고 산업화의 가파른 흐름에 함께 하던 시멘트는 박주희의 작품 속에서 기억을 드러내는 가장 말랑하고 유연한 재료로서 사용된다. 각이 진 형태에 새겨진 균열의 틈은 물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변곡점이 되며, 광섬유 파이프에서 나오는 조명과 흐르는 물의 소리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며 구조체 내 화면에 나타나는 문장들이 외부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한다.

 

 가부장제, 재생산과 돌봄의 굴레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변칙성을 갖고 할머니들의 삶 속 겹겹이 영향을 끼쳤다. 그 아래에서 노동은 지워지고 곧바로 위에 덧입혀지기를 반복하며 견고한 구조와 무게로 개인을 짓누르는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에 머무르던 한 인간의 목소리는 생동하는 질료들로 가득 찬 구조물의 틈 사이에서 다시금 새어 나오게 한다. 엄마, 딸, 아내, 어머니, 며느리와 같은 호칭들은 할머니들에게 수도 없이 덫 씌어 왔다. 작가는 오랜 시간 시대의 냉담을 견뎌내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호칭이 우수수 탈각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개인의 이야기들을 관람객들이 단순히 관찰하거나 응시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도록 유도한다. 타자의 기억 속에 자기 감각을 기대어 두게 하는 작품들은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온다.’라는 지명 영귀미의 뜻과 같이 새로운 운율과 박자를 품고 함께 ‘존재함’의 영역에서 울려 퍼지는 기억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름다운 곳은 바로 내 삶의 순간이 기억되며 퍼져 나가는 움직임, 끊기지 않는 노래 한 곡을 온전히 큰 소리로 이어 부르며 나 자신으로 기억되는 그 순간이다.

■ 영귀미 詠歸美;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온다.

박주희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에 거주하고 속초1리 경로당을 찾는 할머니들의 삶의 기억을 조명하고자 한다. 작품 <영귀미 詠歸美>, <노동그릇>, <까꿍!>에서 할머니들의 말과 소리로 남은 흔적을 주목한다. 글과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잊혀지는 삶을 기록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할머니들의 삶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사회에서 여성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로, 예를 들어 어머니, 딸, 며느리, 집안사람, 아내 등 하나의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기 보다는 사회 구조의 당연함 속에 지워지는 역할로 여겨졌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사회는 산업화를 지나 규모 있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회색의 도시들을 남성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렇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남성과 역사, 즉 주류라고 부르는 기억들은 역사로 기록되었고 할머니들의 삶은 잊혀졌다. 할머니들은 여성을 지칭하는 호칭만 남아 글로 기록되지 않는 타자의 존재로 남았다. 

 할머니들의 삶은 단지 호칭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었을까? 거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 할머니들은 딸, 아내, 어머니, 며느리, 그리고 할머니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할머니들은 알게 모르게 희생을 요구당 했고 그것에 응하며 살아가는 수동적인 존재로 비춰졌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당연한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지치지 않고 그들만의 단단한 결속력을 기르고 치열하게 가족의 생사를 이끌어 나갔다. 할머니들의 터전이었던 빨래와 설거지를 하는 냇가에서, 물을 길어오던 강가에서,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 부엌에서, 할머니들은 자신이 아닌 자식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소리 없는 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자본주의와 전쟁, 산업화가 지나가고 있는 모더니즘의 자리에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 속에 은폐되어 왔던 할머니들의 삶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치열하고 강인한 틈을 주목하고 단지 드러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며 수면 위로 끌어 올리고자 한다.

 

 본인의 삶과 맞닿아 있는 할머니들은 단지 할머니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라진 사회 구조를 들어내고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기억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영귀미 詠歸美> 이 작품은 할머니들의 얼굴과 삶의 이야기를 주목한다. 흑백의 화면에는 그녀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가 그녀들이 치열하게 겪어온 삶과 가족을 상징한다. 담담하게 지나가는 할머니들의 표정은 관객에게 그녀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노동 그릇> 이 작품은 할머니들의 노랫소리와 그녀들이 살아온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시 설치 는 시멘트로 만든 그릇 30여점과 할머니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이루어진다. 시멘트 그릇은 중간 중간 녹아내려 철골 구조가 드러난 형태이고 항아리, 그릇,사발 등 다양한 모양으로 되어있다. 노랫소 리는 할머니들이 부르는 노래로 중간 중간 먹먹해지기도 하고 바람이 새어 나가기도한다. 그릇의 틈 사이로 새어나가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살아온 공간은 사회가 그녀들에게 요구하던 생활과 역할이었다. 부엌, 냇가 등의 공간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그녀들이 일을 해야하는 곳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짓고 가족의 삶을 이어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공간이자,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게하는 곳이다. 

 

 시멘트 그릇은 그러한 사회 구조를 상정한다. 그녀들의 일을 비유하기도 하고, 마치 지칭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 할머니들의 삶처럼 닳아 있는 그릇은 녹아 흘러내리며 형태를 이루고 있던 구조를 드 러낸다. 할머니들의 삶과 노랫소리는 견고하다고 보이는 사회구조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치열하게 삶과 젊음을 이어나가고 싶은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숨막히고살아가 기 힘든 사회에서 부르는 노동요처럼 견디기 힘든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까꿍!> 이 작품은 거대한 시멘트 구조와 PVC 파이프로 만든 조형물이다. 건물에서 이어진 구조물들 은 자신의 기능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들을 비집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흔적을 만들며 할머니들의 삶이 새어 나오게 된다. 모든 걸 전복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그녀들은 무장하지 않는다. 단지 아직 말 랑말랑한 아이를 대하듯 툭툭 털어내고 말을 걸어올 뿐이다.

 

 

 

 

[1]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박범수 번역, 동문선, 2020, 82쪽.

[2] 본 글에서는 작품의 중심이 되는 ‘할머니’를 ‘그녀’라 지칭하는 것을 지양하였다. ‘그녀’는 지칭/지시의 기능 뒤에 곧바로 성별을 붙임으로써 기존에 부여되었던 전통적인 여성의 의미체계에 몰입하게 하여 사회 구조의 책임을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관람객에게 이들의 이야기가 입체성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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